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아보자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 어째서 실패했는지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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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은 서부전선이라는 지상에서만 고난을 겪지 않았다


오히려 바다에서 더욱 취약했다


물론 이게 독일의 해군력에 패배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의 항구 봉쇄를 허용했다


바다에서 독일군에게 노출된 건 협상국과 중립국의 상선이었고, 수단은 잠수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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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수입에 최고로 의존하는 품목이 달랐다


영국은 식량이었다


1914년 8월에 영국 빵 5개 중 4개는 수입산 밀로 만들어졌다


5개 중 3개엔 수입산 버터가 들어갔다


영국의 식량 수입 의존도는 전쟁 전부터 매우 높았고, 전세계를 아우르는 식량 무역망이 존재했다


이렇게나 거대한 무역로를 보호하기는 영국 해군으로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영국은 전쟁이 터지자 운임을 점점 올리는 선주들의 수익을 통제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


그런 조치 중 하나는 초과이득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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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식량을 수입에 덜 의존했다


전선이 고착된 후에도 여전히 넓은 농업지대가 존재했고 여자, 노인, 아이가 성인 남성의 빈 노동력을 채웠다


하지만 프랑스는 국가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지역이 점령당하면서 수많은 광산을 잃고 말았다


석탄의 경우엔 채굴량이 약 50%가 줄어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총력전 때문에 석탄 수요가 치솟아올랐다


이로 인해 프랑스군의 포탄 위기가 1915년 8월에야 해소되었다


군수공장만 석탄을 먹는 것이 아니다


군 보급과 배치에 필수적인 열차도 석탄을 소모하고, 민간인의 음식 조리와 겨울나기에도 석탄이 필요하다


게다가 프랑스 해운업계는 전쟁 전부터 악명높았고


조선소를 군수공장으로 전환했기에 침몰하는 상선을 보충하기가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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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국가는 본토에서 주로 나는 자원이 달랐기에 수입으로 채워야 할 자원도 달랐다


배 숫자가 무한하지 않으니 이 문제로 갈등이 엄청났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에서 영국의 전통적인 역할은 동맹에게 자원을 공급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이를 겪은 적 있는 프랑스는 당연히 영국이 우리에게 자원을 공급하리라고 믿었다


그러나 잠수함 공격으로 점점 줄어드는 용적 톤수 때문에 운임이 상승했고 보험료가 갈수록 높아졌다


당연히 석탄 가격이 폭등했고 광산 소유주와 선주들의 지갑이 두둑해졌다


영국은 그들의 지갑을 초과이득세로 다시 털어가려 했으나


영국이 금고를 채우려 그런다고 오해한 프랑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예를 들어, 프랑스 상원 외무위원회는 프랑스 무역업자가 영국 무역업자에게 내야하는 막대한 운임에 항의했다


군수장관 알베르 토마는 1916년 4월에 로이드 조지에게


영국이 높은 운임이라는 형태로 프랑스에 초과이득세를 물리는 문제를 처리해야 오해를 막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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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과 프랑스는 해운 공격이라는 독일의 전략에 매우 취약했다


로이드 조지가 1916년 12월에 총리가 된 후 첫 연설에서 표현하길


'해운이란 심하게 손상되면 국가의 목숨이 끊어지는 경동맥입니다.'


 영국이 걱정했던 대양함대보다 잠수함이 생존에 훨씬 거대한 위협이었다


독일은 1917년에 무제한 잠수함 작전이라는 전략적 도박을 시도했다


이는 경고 없이 눈에 보이는 모든 상선을 공격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 도박은 거의 성공할 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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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전 무렵, 대양을 항해하는 전세계 선박 8445척 중 4174척이 영국의 것이었다


프랑스의 것은 357척에 불과했다 


당연히 잠수함에 잃는 화물선 대부분이 영국 것이었다


1916년 동안 1달에 공격받아 잃는 용적 톤수가 6만톤에서 12만톤 이상으로 증가했다


 1916년 4월까지는 건조량이 손실량을 따라갈 수 있었으나, 곧 따라잡혔다


1916년 말엔 150만톤의 선박을 잃었는데, 영국이 진수한 선박은 50만톤에 불과했다


여기에 솜 전투로 군에 대규모 군수물자를 공급해야 했기에 다른 물자를 옮기는 데 쓸 선박이 부족해졌다


동맹들에게 해줘야 했던 공급도 제한된 용적 톤수에 부담을 주었다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물자 공급용 특수 목적 선박을 할당했고


그렇게 두 국가가 상선을 징발할 필요를 줄여주는 대신 정기용선료를 부과했다


1915, 1916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용선한 영국 상선은 600척이었다


게다가 영국은 프랑스로 달마다 20000톤의 냉동육과 13000톤의 석유제품을 수송했다


그리하여 프랑스가 수입의 48%를 영국배로 하고 26%만 자기 소유의 배로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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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자원이 줄어드는 한편 협상국들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여 갈등이 터져나왔다


1916년 각료회의의 주요 주제는 운임이었다


프랑스 상무장관 에티엔 클레망텔은 회의 중 '영국의 도움을 구걸'이라는 표현을 쓴 바가 있다


프랑스 전쟁부 경제과는 1916년 4월에 화물에 관한 보고서를 제출했는데, 거기에 따르면 


'프랑스와 이탈리아가 높은 운임에 시달림에도 영국과 중립국 해운사들이 주주에게 거액의 배당을 주고있다'


다음달에 나온 보고서가 내린 결론에 따르면


'영국 재무부가 엄밀하게 공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재정 조치로 이득을 보고 있다.'


그 보고서의 전체적인 어조는 프랑스군이 서부전선에서 맡은 부담에 대한 불만을 드러낸다


특히 '국경에서 흐르는 피가 무역업자들의 재산의 원천이 되는 것을 막아야 한다.'라는 표현에서 말이다


조프르 또한 1916년 7월 14일에 영국이 포탄을 한달에 겨우 145000발밖에 생산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이것이 시장에서 독일이 쫒겨나며 생긴 자리를 영국이 차지하는 데 급급하느라 생긴 현상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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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부당한 주장이다


게다가 프랑스는 작은 선단과 자원지대 상실에도 불구하고 선주들에 대한 통제를 느슨히 하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회사들이 겪은 제일 높은 선박 징발율은 32%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회사가 이보다 훨씬 낮은 수치로 징발당했다


프랑스는 상선을 1918년 2월에야 완전히 징발했다


프랑스 선주들은 높은 운임으로 이득을 취했고, 몇몇 회사는 더 큰 욕심을 부려 영국에서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게다가 통제를 어렵게 만드는 자치 선단이 존재했다


민간 식량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상무부 선단이 존재했고


일명 석탄함대였던 공공사업부 선단도 존재했다


해군부 또한 함대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선단을 보유했고


전쟁부는 1916년 중반까지 프랑스에서 가장 거대한 용선 회사를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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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문제는 항만폭주 때문에 더욱 심각해졌다


르아브르 항만은 1916년에 1913년보다 60% 많은 용적 톤수를 처리했고 99% 많은 상품을 취급했으나


노동자 수는 전쟁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60개중 14개의 하역용 부두를 영국에게 넘긴 루앙에선 1916년까지 통항량이 2배로 증가했다


프랑스 석탄 수입의 1/3이 여기로 들어오기에 루앙이 특히 까다로운 상황이었다


솜 전투로 상황이 악화되었다


영국 군수차관 크리스토퍼 에디슨에 따르면


'주요 장애물은 시대에 뒤떨어져 많은 양의 군수품을 처리할 수 없는 프랑스 항구에 있는 듯 하다. 지난 2주 동안 프랑스 철도가 처리할 수 있는 것보다 많은 군수품이 도착했다.'


 영국은 1916년 6월에 프랑스의 주요 항구들을 감독하고 무개화차 부족이 지연의 주원인임을 알아냈다


이런 이유로 석탄 하역이 느려 배가 영국으로 늦게 돌아갔다


배가 늦으니 수출용 철강이 항구에 쌓이게 되었다


프랑스는 철강 부족에도 시달렸다


슐리펜 계획으로 철강 산업이 붕괴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배가 하역시설과 대형 크레인 부족 때문에 철강을 내리지 못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가끔 벌어졌다


사실 항구 혼잡으로 인한 수입량 감소는 잠수함으로 인한 수입량 감소만큼이나 컸다


유보트가 가장 활발했던 1917년에도 입항 지연으로 인한 손해가 바다로 침몰한 화물량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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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설명한 모든 문제로 인해 국가통제가 확립되어야 했다


용선과 징발이 1914년에 시작되었고 1915년 11월에 선박허가위원회가 설립되었다


1916년 1월엔 군사적 목적의 필수품 수입 물량을 협상국들에 어떻게 할당할지 결정하는 해운통제위원회가 나타났다


동시에 영국 봉쇄부가 설립되었다


운임과 보험료 상승으로 인한 가격 상승을 지속적으로 확인했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요금을 표준화하여 일명 Blue Book 요금이 등장했다


적어도 영국에선 전쟁 발발 2년 후 일반적인 영리기업이 붕괴 중이었고 감소하는 용적 톤수만큼 통제가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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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국가통제는 비효율적이었지만 어쨌든 영국을 모범으로 삼았다


해군장관 라카즈 제독은 1916년 4월 4일에 푸앵카레에게 국가 필수 물자만 운송해야 한다는 법안을 제출하여


국가의 이익과 협상국의 이익 모두에서 행동의 일치를 보이자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모든 상선이 목적지가 어디든 해양부에게 특별 면제받지 않는 한 필수품만 수송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는 수입품을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상선 사용을 엄격하게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1916년 2월 29일에 제정된 그 법령은 해운위원회가 작성했다


국회의원들이 프랑스의 해운이 비효율적임을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기 위한 정치적 압력을 해운위원회에 넣었다


이제 쾌속선이 병력이 아닌 물자만 실어야 하게 되었고, 하역 후엔 빈 채로 돌아가야 했다


3월 24일 운임 인상에 대한 질의가 끝난 후 이루어진 정부 신임투표에서 협상국의 공동선단 창설 요구가 등장했다


1916년 11월엔 철도수송, 수운, 해운을 아우르는 운송 및 수입 총괄 기관이 해운위원회를 대체했다


이 총괄 기관은 운송 계획을 수립하고 수입품 우선순위를 정하고 공공서비스 용도로 용선된 배 입출항을 통제했다


또한 각 부의 자치 선단을 흡수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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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항만 폭주는 영국이 조치했다


에릭 게데스가 철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글라스 헤이그와 만나러 프랑스로 떠났다


프랑스군이 베르됭과 솜에서 싸우는 동안 영국이 프랑스의 항구와 철도를 감독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


게데스는 즉각 솜 전투를 위한 철도를 개선할 수 있었고


프랑스가 철도 권한을 영국군에게 넘겼기에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남아있었다


해운통제위원회는 프랑스 항구의 수용력을 고려해 프랑스에 할당된 석탄 수입량을 줄이고 허가증 발급을 줄였는데


이러한 조치가 오해를 낳아 프랑스인들의 분노를 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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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강한 통제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싸고 숫자가 부족한 외국배에 더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1916년 1월에 이루어진 상황 검토에 따르면 영국 해운이 협상국 수요를 채워주려면 150만톤의 할당량이 필요했는데


이는 영국이 협상국을 위해 징발하거나 용선해준 용적 톤수를 넘어서는 수치였다


1916년 말에 프랑스로 물자를 운송하고 하역하는 데 따르는 문제가 심각해져 갔다


영불해협 양측에서 문제를 해결할 더 체계적인 방법을 조속히 시도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


특히 잠수함에 의한 손실이 너무나 심각한 나머지 언론에서도 보도하기 시작했다


확실히 프랑스 산업은 위기를 맞고 있었다


프랑스 의회에서 이러한 수송 위기를 길게 논의했다


하원은 11월에 3번의 길고 감정적인 회기를 열었고, 주로 석탄 부족으로 초래된 위기에 대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댔다


상원에선 12월 19일에 비밀 회기를 열었는데


클레망소가 여기서 석탄 부족 때문에 문을 닫거나 생산량이 떨어진 공장 목록을 발표했다


통계에 따르면 프랑스의 석탄 위기가 재앙적인 수준에 도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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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국의 전쟁수행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 자원 공급, 군수물자 공급으로 역할을 나눴다


프랑스는 국가에서 두번째로 산업화된 지역이 점령된 상태에서 총력전을 수행했음에도 3억발이 넘는 포탄을 생산하며


세르비아군, 벨기에군, 루마니아군, 그리스군, 미군을 무장시켰고


영국군, 러시아군, 이탈리아군에 수많은 군수물자를 보급했다


프랑스는 이를 위해 1915년에만 130만톤의 철과 강철을 수입했는데, 이 중 89%가 영국산이었다


군수 노력을 1916년 초 30만톤을 잠수함에 잃고 운임이 5배로 상승했음에도 달성했다


예로, 카디프에서 영불해협의 프랑스 항구로 석탄 1톤을 옮기는 비용은 4실링 3펜스에서 1916년 7월에 23실링으로 올랐다


타인에서 대서양 항구로 옮기는 비용은 같은 기간 5실링 9펜스에서 35실링으로 올랐다


프랑화로 보면, 카디프에서 마르세유까지 석탄을 옮기는 비용이 원래 8.5프랑이었다가 1916년 3월에 90프랑으로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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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에 협상국 해운에 질서를 부여하고 조정하기 위한 다양한 조치들이 행해졌고 체계화되었다


이는 전쟁 전에 체결한 금융 협정의 연장으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영국의 전통적인 활동 영역이었던 금융이 협력의 동력기관으로 기능했다


1915년 2월에 영국과 프랑스가 러시아에 경제 지원을 해주기로 결정했다


이어 4월에 양국의 재무장관인 로이드 조지와 알렉상드르 리보가 추가 협정을 이루었는데


프랑스가 런던에서 150만 프랑 신용장을 트고 런던에 금을 대출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다음 달엔 프랑스가 미국에서 물자를 구입하기 위한 구매 대리인으로 영국을 따라 J.P 모건을 선택했다


영국 내 구매는 더 일찍 공식화 되었다


프랑스 대사 폴 캉봉은 1914년 8월 5일에 영국 외무부로 찾아가


프랑스군이 식량, 피복, 기타 군수품을 영국에서 구입할 수 있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제한된 물자에 대한 양국의 경쟁을 최소화해 가격 상승을 억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8월 17일에 국제조달위원회(Commission Internationale de Ravitaillement)가 설립되었다


이는 야심찬 이름에 비해 미약한 조직이었으나 단단한 협력의 첫발인 조직임은 부정할 수 없다


국제조달위원회, 이하 CIR 덕분에 금융 및 구매 협조를 확장할 수 있었다


CIR은 구매품의 육상, 해상 수송을 해군부 및 상무원과 접촉하는 대표를 통해 조정했다


 CIR은 구매품을 직접 이동시키기 위한 용적 톤수를 부여받은 덕분에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용적 톤수가 포탄 제조용 철강을 프랑스로 보낸 다음, 영국에게 필요한 건초를 싣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협상국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알아내기 위한 중앙집권적 수단이 없었기에 


CIR가 불충분한 도구임이 곧 밝혀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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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선박을 영국과 협상국들에 할당하는 영국 해운통제위원회가 1916년 4월에 수요 조사를 실시했다


영국 수요에 프랑스, 이탈리아의 요구를 더했더니


전쟁 첫해의 수입 무역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선 용적 톤수가 325만톤 더 필요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위원회가 협상국에 할당된 영국 용적 톤수를 4월 1일의 수치로 제한해야 한다고 5월에 권고했다


위원회는 심지어 프랑스에게 용적 톤수 할당 약속을 철회하겠다는 위협도 했다


훗날 유럽연합의 아버지가 되는 장 모네가 자신의 협상력과 인맥을 동원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알고보니 해운통제위원회가 계산을 대충 한 것이었다


잘못된 계산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 필수 물자 부족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협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더욱 강하게 인지하기 시작했다


7월엔 협상국의 용선을 중앙집중화 하기 위해


석탄, 곡물, 광석을 관장하는 용선위원회 3개를 CIR에 설치하자는 안건이 나왔다


이는 CIR에게 모든 선박의 허가증 발급, 거부 권한을 전부 넘기는 계획이었으나, 성공하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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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전쟁부에서 포병과 군수를 책임진 알베르 토마는 더 강력한 협상국 협조와 물자 통제를 밀어붙이고자 했다


1915년 8월 런던에서 열린 군수 회의에서 토마는 영불 단일 군수부 설립을 주장했다


11월 회의에선 건설계획, 주문, 원자재 공급 상황을 논의하기 위해 격월로 회의를 여는 중앙군수부를 주장했다


로이드 조지는 토마를 지지했으나, 양국 군부가 급진적인 개방에 난색을 표했기에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압력으로 알베르 토마와 에드윈 몬타구가 1916년 9월 6일에 한가지 계획에 공동 서명했는데


바로 협상국간 군수국 설립이었다


목적은 미국 시장에서 공동구매였다


원자재, 무기, 탄약, 폭발물, 기계장비 주문서들을 우선 군수국에 제출하고, 주문서를 하나로 통합해 공급자에게 넘겼다


이 협정으로 물건을 유럽으로 배송하기 위한 해운이 중앙집중화 되어 일이 훨씬 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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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영국의 식량 공급 위기였다


독일은 유틀란트 해전 이후 더 크고 강력한 규모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재개했다


제한된 용적 톤수 문제와 영국의 식량 문제로 골치 아픈 분위기에서


에티엔 클레망텔이 1916년 11월에 런던에서 교섭을 벌여 밀집행위원회 설립과 교통수단 마련을 위한 협정을 맺었다


여기에 서명한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자국이 소모할 밀은


각자의 선박이나 밀집행위원회가 용선한 보조 선박, 대용 선박으로 수송하기로 했다


대용 선박은 협상국 혹은 중립국이 밀 수송에 쓸 용적 톤수와 교환해 용선해주는 배를 뜻했다


밀집행위원회 덕분에 빵 하나를 놓고 아군끼리 서로 머리채를 잡으며 싸우지 않게 되었다


이제 호주 밀이 영국보다 가까이 있는 이탈리아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밀을 사러 미국까지 가는 이탈리아 공선이 밀을 사러 호주까지 가는 영국 공선과 지중해에서 마주치는 일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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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2월 3일, 밀집행위원회 발족은 즉시 해운과 관련된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영불 협정으로 이어졌다


이는 해운 협의의 안정적 기반을 제공하는 대신 긴급사태에 대처하기 위한 계약이었다는 점에서 임시방편 성격이 강했다


긴급사태의 예로 1916년 8월과 11월 사이 프랑스의 영국 석탄 수입량이 30% 감소하며 운임이 상승한 일이 있었다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 할당된 용적 톤수는 유지되었지만 그 용적 톤수를 어떻게 사용할 지는 제한하지 않게 되었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협력을 더 풍부하고 정확한 자료를 사용해 확대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와 영국이 해운업계 고용 명세서를 매월 공유하게 되었고 


프랑스 밀을 밀집행위원회와 협의하여 운송하게 되었고


프랑스로 석탄을 운반한 선박이 갱도 버팀목을 싣고 영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중립국에 용선한 용적 톤수를 중앙집중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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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무부는 상호 용적 톤수 협정이 가져다 줄 엄청난 이점을 환영했다


프랑스측 기록에 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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